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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입을 열어 찬양하게 하시는 예수님

by Missionmaker21 2026. 5. 17.

2026년 5월17일 주일 오후예배

본문: 마태복음 9장 32-34절 

제목: 우리의 입을 열어 찬양하게 하시는 예수님

 

지난시간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들의 입을 여시고 당신을 찬양하도록 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매우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을 고백하지 못하는 귀신들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로 고백함으로 주님의 치료함을 받은 사건을 살펴 보았는데 오늘은 특별히 말을 하지 못함으로 그 어떤 고백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내용입니다. 

 

9장 32절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맹인과는 다르게 벙어리는 주님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입술로 예수님에 대한 그 어떤 고백도 하지 못했습니다. 애원하지도 그리고 주님 저를 도와 주세요라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래도 주님을 나의 구주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백도 할 수 없었던 말을 하지 못하는 가여운 그 한 사람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시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를 치료하시며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니 그래도 구원을 얻으려면 최소한 회개기도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생각해 봅시다. 평생동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원치 않은 일로 인하여 치매를 겪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가 지금 고백하지 못했다고해서 구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는 말씀일까요?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주님을 다시 끌어내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나 말을 멋드러지게 하기 때문에 구원을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하신 주님 앞에 자신의 죄 때문에 감히 한 마디도 못하고 얼굴을 들지도 못하는 자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주님은 그들의 마음과 답답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으러 가셨던 것입니다. 택한 주의 백성이기에 말입니다. 그가 주님의 자녀이기에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 어떤 누군가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나의 말 못하는 그 상황들을 다 듣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찾지 않았는데 친히 나를 찾아 오셔서 나의 그러한 심령을 위로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 보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간혹 오해를 합니다. 무엇인가를 잘 해야만, 그리고 멋지게 주님을 고백해야만 구원을 받을 것 같은 모든 생각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싶습니다. 

 

31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그들의 반응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귀신은 떠나가고 말 못했던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에 유대인들과 예수님 주변에 있던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라고 합니다. 

*** 그런데 치료함을 받은 이 벙어리는 어떻습니까? 말을 하게 되자 그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 찬양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벙어리와 같은 우리가 치료함을 받은 후 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말을 할 수 있으니 그동안 내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놀려 댔던 사람들을 찾아가 욕이라도 퍼 부어 주어야 하나요?  아니면 그 때 그들이 잘 못 말했던 것들을 기억하여 바로 잡아 주어야 하나요? 

그러나 치료함을 받은 사람은 그런데 관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 이름을 높입니다. 

 

*귀신이 그 입을 막고 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찬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찬양과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은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예배 드리지 못하게 하는 귀신과 같은 존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입은 있는데 예배 시간에 찬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가장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바라 보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벙어리는 자신의 입을 열어주신 그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알기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와우 놀랍다 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벙어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질병 즉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질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찬양으로 마음껏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니 치료의 주님을 만난것보다 구원을 베풀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생을 얻었음에 대한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아직도 벙어리인지 우리의 현 상태를 살펴 보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찬양하지 않습니까?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데 왜 찬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9장 34절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끝까지 주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 은혜도 주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적을 직접 그곳에서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막혀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육적인 눈과 입은 열려 있으나 영적인 눈과 귀가 멀어버린 그 사람들이 곧 지금의 나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귀신을 힘 입어 이 일을 행하였다고 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우리도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다시 한 번 더 나를 바로 보게 됩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 영적인 치료함을 받은 사람은 이 모든 일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영원토록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구원은 하나님 편의 일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집니다. 율법과 계명을 아무리 잘 지켜도 결코 구원의 자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구원의 기준은 선행이나 도덕적 우수함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가능한 나의 구원입니다. 또한 주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하지만 택한 백성이 아닌자는 구분해 내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 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아무리 잘 한다고 해서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계명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은혜를 아는자 됩시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오직 예배로 나타납니다. 오직 찬양으로 그의 삶이 나타납니다. 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는 나의 예배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보다 세상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함도 아닙니다. 또한 나의 감정을 기쁘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더 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은 주님께 무엇을 더 드릴까를 고민합니다. 무엇을 해야 주님이 기쁘실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므로 그는 죄악 가운데 더 이상 거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싫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께 붙어 있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합니다. 

주님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26년 5월 17일